2015. 6. 19. 02:18 | 2차


 낡은 회색 벽돌으로 이루어진 긴 회랑은 을씨년스러웠다. 드문드문 설치된 가스등 안에서 희미한 불꽃이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하며 춤추었다. 루피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슬리퍼 소리가 차가운 벽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그 외엔 누군가 소리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막했다. 하다못해 가스등 특유의 공기 새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별 이상을 느끼지 못한 루피는 계속 걸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벽돌 사이사이에서 피어난 넝쿨이 비쩍 마른 노파의 손가락처럼 그 줄기를 곳곳으로 뻗치고 있었다. 진한 회색 넝쿨은 그대로 석화되어 벽면 전체에 기묘한 문양을 그렸다. 재미있는 곳이네. 제 말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제야 루피가 입술을 오므렸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멀찍이서 무거운 발소리가 돌풍과 함께 불어왔다. 루피는 고개를 치들고 귀를 기울였다. 질질 끄집는 듯한 소리는 점차 멀어지는지 작아지고 있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루피가 다급히 왼발을 뻗었다. 다시 오른발, 왼발. 드러난 발엔 상처가 가득했다. 맹풍을 가를 때마다 슬리퍼가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처럼 흔들렸다. 어느새 바람은 바늘로 구성된 것처럼 따갑게 루피의 피부를 찔렀다. 따가운 자리마다 땀과 피가 섞인 방울이 살갗에 머물렀다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발을 아무리 강하게 박차도 속도가 붙기는커녕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래도 루피는 멈춰 서지 않고 달렸다. 그는 손을 놓아버리고 가만히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것이 언제건 간에. 아직까지 그 사실은 변치 않았다.


  한참 달리다 보니 바람이 멎었다. 부릅뜬 눈이 익숙한 등을 찾았다. 어? 루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등에는 흰 수염의 문장이 뚜렷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루피가 지금껏 보아 왔던 것과 달리, 그 등은 굽어 있었다. 끌려가는 죄인 같았다. 손과 다리, 어디 하나 묶인 곳이 없는데도 원치 않는 길을 걸어가는 가축처럼 보여 루피는 소리를 질렀다.


  에이스! 에―이―스!! 성대를 잘라내 버린 듯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루피는 끊임없이 이름을 부르짖었다. 에이스를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채웠다. 에이스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 가는 거야! 시린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워 루피는 몇 번이고 넘어졌다. 무릎이 깨지고 이마에서 피가 솟았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시야가 두 개로 나뉘었다가 합쳐졌다. 새로 생긴 게 분명할 상처인데도 언젠가 이미 느꼈던 감각이 정신을 뒤흔들었다. 루피는 벽을 짚고 겨우 걸었다. 바싹 마른 넝쿨이 힘을 줄 때마다 부스러졌다.


  에이스는 이미 멀어져 곧 사라질 것 같았다. 루피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새까만 신발의 밑창이 끈적이는 걸 밟아 나가듯 쩌억 쩌억 소리를 내며 복도에 붙었다 떨어졌다. 설핏 보이는 종아리가 유난히 희었다. 선뜩한 느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에이스를 처음 만난 일곱 살의 어린 날처럼, 루피는 엉엉 울어버렸다. 그는 애단 마음에 헛손질하면서도 타일 틈새에 손을 끼워 넣고 기었다. 가지마. 가지마, 에이스.


 "에이스!!"


  회랑이 침묵했다. 가스등마저 그 불을 삭였다. 그림자가 온 복도를 덮을 듯이 면적을 넓혔다.


 "두고 가지 않는다며!"


  그러나 다 자라지 못한 아이의 그림자는 너무도 짧아서.


 "가, 가지 마! 흐어어엉… 에이스으!!"


  남자면 울지 말라고 얘기해 달란 말이야. 다시 커진 불꽃에 그림자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어느덧 에이스의 형체는 사라져 있었다. 루피는 몸을 옹송그렸다. 바닥에 납작 달라붙은 몸은 꼭 회랑의 일부처럼 보였다. 숨을 죽인 아이가 침잠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가스 새는 소리가 들렸다. 위태롭게 일렁이던 가스등의 유리가 펑 터지더니, 저 멀리서부터 연이어 터져 불꽃이 튀었다. 삽시간에 광대한 불의 바다가 펼쳐졌다. 천장을 뒤덮었던 화마는 날카롭게 세운 발톱을 한 용의 모양으로 사뿐히 땅에 내렸다. 루피는 조각이라도 된 마냥 미동도 없었다.


  짐승은 발톱을 숨기고 바닥에 떨어진 밀짚모자를 주웠다. 웅크린 조각상에 다가가는 걸음마다 까만 망토가 부드럽게 날렸다. 계속해서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은 종종 불티를 날렸으나 어디에도 상처입히는 일 없이 사라졌다. 루피와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인간의 상을 취했다. 마침내 루피의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말쑥한 남성의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루피. 상냥한 목소리는 루피의 귀에 닿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린 그가 루피의 머리에 밀짚모자를 씌워 주었다. 루피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눈을 뜨지 않았다. 까만 장갑을 낀 손이 루피의 말랑한 볼을 잡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마법을 부렸다. 루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번엔 다른 감정이 방울져 까만 장갑 위를 굴렀다.


 "사보…. 사보야?"

 "안녕, 루피."


  애정 어린 미소가 대답하자 폭포수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꺽꺽대는 비통 사이로 간신히 몇 마디가 새어나왔다. 사보. 사보… 에이, 에이스가…. 나…. 차마 단어를 이루지 못한 글자가 가슴을 할퀴었다. 아직도 울보구나? 루피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사보가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아직 이 형이 있잖아."


  듬직한 얼굴 뒤로 놓쳐버린 웃음이 떠올라 루피는 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마주 끌어안은 사보가 루피의 등을 다독였다. 그가 진정하도록, 아주 다정한 움직임이었다. 불꽃처럼 따스한 사보의 몸은 위안이었다. 


  에이스…. 사보의 어깨에 코를 박은 루피가 웅얼거렸다. 잊을 수 없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동시에 루피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안도가 지저에서부터 색을 입혔다. 루피, 다음에 만나자. 사보는 부어오른 눈가를 살며시 쓸어주었다. 루피가 끄덕이자 사보는 다시 화염을 품은 용이 되어 회랑을 날았다. 루피는 제 힘으로 일어서 사보를 지켜보았다.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깨진 가스등이 되돌아와 환한 빛을 냈다. 이번에는 색을 가진 채였다. 모노톤의 회랑이 천천히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보드라운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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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8. 04:05 | 2차


* 루피 TS

* 로우 캐붕 주의





  로우는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나직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멋스럽게 나오는 것 같았다. 각이 잘 잡힌 까만 정장도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고, 손에 든 장미꽃도 싱그럽게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든 작은 상자도, 두말할 것 없이 반짝이리라. 로우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선명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훗. 태양마저 부러워 할 정도라니. 로우의 입꼬리가 귓가에 매달릴 듯 치솟았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상대만 오면 된다.


  그러나 루피는 약속 시각이 넘어서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로우는 미간을 모으고 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행여나 정장에 주름이라도 잡힐까, 구두에 먼지라도 묻을까 모든 행동을 조심했다. 한낮의 땡볕은 나무 그늘로 가리기엔 지나치게 뜨거웠다. 갈색 얼굴을 따라 긴장과 걱정, 초조함이 얽혀 땀과 함께 흘러내렸다. 삼십 분이 지나도록 루피의 목소리는커녕 여자의 구두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 달 넘게 고심해 준비했던 이벤트가 무산될 것 같은 기분에 로우는 평소보다 빨리 인내를 잃고 말았다. 사실 루피와 얽히면 언제건 그렇게 되곤 했다.


 "대체 왜 안 오는 거란 말이냐, 밀짚모자야!" 


  발을 쾅 구르고 속내를 토해내자 손에서 불길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계획을 짜며 미리 상상해 보았던 끔찍한 미래가 완벽한 준비라는 댐을 무너뜨리고 홍수처럼 로우의 머리에 범람했다. 선탠이라도 한 것 같이 건강미가 넘치던 얼굴이 삽시간에 파랗게 질렸다. 벌벌 떨며 내려다본 꽃은 줄기가 똑 부러져 꺾여 있었다. 비닐 포장 안에 곱게 장식되어 있던 연보라빛 색지도 엉망으로 구겨져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지. 어떡하지. 눈동자가 정신없이 돌아가며 꽃집을 찾았다. 하지만 약속 장소는 공원이었다. 꽃집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절망하는 로우에게 때마침 두 번째 불행이 몰아쳤다.


 "토라오!!"


  루피가 환하게 웃으며 로우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풀어지는 로우의 입매가 두말할 것 없이 팔불출의 그것이었다. 로우는 연인의 웃음에 현 상황을 몽땅 잊어버리고 루피에게 다가서려 했다. 연이어 발생한 불행에 안타까웠는지 운 좋게도 장미꽃 포장에서 난 바스락 소리가 그를 멈춰세웠다. 제정신이 돌아온 로우가 바닥에 붙박인 듯 섰다. 루피는 그가 자신에게 뛰어들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곤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바람이 탄식하듯 로우 주변을 휘몰아쳤다.


  하필 지금! 오전 내내 보고 싶었던 얼굴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로우는 고함을 내지르려는 입을 가까스로 닫고 머리를 굴렸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 참상을 루피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꽃을 보고 궁금해하면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까지 들킬지도 몰랐다. 로우는 찢어지는 마음을 끌어안고 장미꽃을 나무 뒤로 홱 던졌다. 부러진 꽃은 나무 뒤 수풀로 쏙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뭐야?"


  동그란 눈이 데굴 굴러 나무 기둥으로 향하자 로우가 황급히 시야를 막아섰다. 루피의 얼굴이 아까와는 반대 방향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작은 상자가 든 주머니가 무거워져 로우는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크흠. 아무것도 아니다."


  강제로 미소를 만들어낸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식은땀이 그의 등을 축축하게 적셨고 손동작은 로봇에 비견될 정도로 딱딱했다. 눈꼬리는 애매하게 접혀 웃는지 우는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괴상한 몰골이었다. 누가 봐도 숨기는 게 분명한 행동이었지만 눈치 없는 루피는 그저 잘 모르겠다는 듯 로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루피가 고민에 빠져 입술을 볼록 내밀자 보기 좋게 붉은 입술이 돋보였다. 로우가 크게 숨을 삼켰다. 한 단어가 뇌리를 가득 차지했다.


 "이상한데…."

 "결혼해… 헛!"

 "어엉?"


  이번엔 하얗게 뜬 얼굴이 일그러졌다. 못 들었겠지. 로우가 그렇게 위안 삼으려는 찰나 루피가 폭탄을 터뜨렸다.


 "아하. 결혼하자고?"


  눈을 접어 산뜻하게 웃는 루피는 궁금증이 풀려 시원한 기색이었다. 손바닥을 주먹으로 통 두드리는 모습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뜨거운 것이 주룩 흐르는 감각에 로우는 코를 틀어막았다. 심장이 바삐 뛰어 쿵쿵쿵, 일정한 박자로 그를 울렸다. 멍한 로우의 귀에 그들을 축복하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밀짚모자야가 궁금해하지 않는 걸 보아 환청인 게 틀림없다. 이성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착실히도 움직였다.


 "그래."


  로우는 루피의 발밑에 피어 있던 민들레를 두어 송이 꺾어 포켓치프로 감싸 들었다. 장미꽃 대신 만들어진 조그만 꽃다발은 소탈한 루피와 잘 어울렸다. 여기저기 구겨지고 나뭇잎도 붙어 있는 정장을 입은 로우가 레이디를 모시는 기사의 맹세를 하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결혼하고 싶다."


  주머니에서 잠들어 있던 케이스가 로우의 조심스러운 손길과 함께 바깥에 몸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가죽 케이스가 묘한 크림슨을 띄었다. 루피는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없이 로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런 얼굴이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코피의 흔적이 여실한 낯으로 로우는 저 좋은 결론을 내렸다. 루피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드는 건 진작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우가 기대에 반짝이는 눈을 하고 그 케이스를 열려고 할 때였다.


 "맞아!"


  루피가 기습적으로 로우의 머리를 내리쳤다. 로우는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점차 가까워지는 바닥을 보며 케이스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멀어져 가는 의식의 틈으로 루피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보가 그랬거든. 토라오가 무릎 꿇고 상자 내밀면 이렇게 하라고! …근데 왜지?"


  이 와중에도 목소리가 꾀꼬리 같군…. 그 상념이 마지막이었다.





* 사보의 농간~감히 내 여동생을 노리느냐~


"루피, 그 표범 자식이 그러거든 확 머리를 갈겨!"

"응? 왜?"

"그렇게 한다고 하면 고기 많이 사 줄게."

"좋아! 꼭 때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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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6. 23:40 | 2차


* 사보 출항 직후의 이야기
* 개인적 생각과 과거 날조 주의
* 150615 등록. 150616 내용 추가 및 수정.




  천룡인에게 사람은 길가의 돌멩이와 같았다.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한다는 점이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사람'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장난감일 뿐이었다. 개돼지만도 못한, 저들끼리 번식하고 자라나는 들짐승이었다. 그래서 하늘과 같은 천룡인은, 그의 길을 막는 눈엣가시를 방아쇠를 당기는 아주 간단한 행동만으로 치워 버렸다.

  사건은 거대한 손길을 인지하고 저항해 볼 결심을 품기도 전에 일어났다. 꿈꾸던 소년에게 성큼 다가온 것은 너그럽지 않은 현실이었다. 사보가 몰래 훔쳐냈던 낚싯배에 그동안의 악행을 벌하듯, 철퇴를 닮은 둥그런 저승사자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불만을 외칠 틈도 없이 두 번째 철퇴가 뱃전을 내리쳤다. 배는 바다 사방으로 살점과 같은 조각을 흩뿌렸고 그 잔해 또한 이어진 폭발에 그슬려 멀쩡한 것이 하나 없었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판단한 참상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바다에서 사보를 구해냈을 때, 피투성이 아이는 가느다란 숨결을 할딱이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서 사보를 보았던 이완 코브는 끈질긴 목숨에 경탄을 표했다. 돛단배보다 작고 더 상하기 쉬운 열 살배기 꼬마 아이는 물에 잠겼다 나왔는데도 채 씻겨 나가지 않은 피에 절여져 있었다. 목재의 파편이 박히고 대포의 화마가 피부를 휩쓸어 멀쩡한 곳이 없었다. 혁명을 꿈꾸는 어른들은, 저 아이가 살아난다면 그거야말로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사보는 눈 한 번 뜨지 않고, 손가락 하나 놀리지 않고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관심과 걱정과 흥미부터 쓸데없이 물자를 낭비하는 빈대를 보는 사나운 눈길까지 온갖 감상이 뒤섞여 사보를 눌렀다. 그 탓인지, 혹은 본디 죽어야 마땅할 부상 탓인지 사보의 용태는 점점 나빠져만 갔다. 식은땀으로 매트리스를 적시는 건 하루에도 여러 번 있었고, 발작은 의사가 마음을 놓으려 하면 일어났다. 미래의 혁명군이 탄 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많은 물자를 보급할 여유는 없었고, 따라서 배에는 사소한 의료품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보는 기본적인 처치만으로 끈덕지게 숨을 이었다. 작은 몸에 얼마나 많은 피가 들어 있는지 붕대에 스며들다 못해 밖으로 새어 나오는데도 버티는 생명이 눈물겨웠다.

  바르티고에 이르기까지 긴긴 항해에서 사보는 몽롱한 의식으로 꿈을 꾸었다. 상처가 짓무르고 뼈가 조각나는 고통에 현실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꿈에서 거침없이 발을 내디디고 호기심에 차 구경하며 보내는 초 단위의 시간마다 저도 모르게 사보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무섭기 짝이 없는 현실과는 달리 꿈은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차마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아름다움으로 사보를 끌어당겼다.

  사보는 배를 타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맑은 호수를 지나 반짝이는 녹음으로 항해했다. 사보의 해적선은 아주 커다래서 마치 그가 전에 보았던 천룡인의 배 같았다. 그러나 화려하고 욕심만 채우는 천룡인의 배와는 달리, 날렵해 보이는 몸체가 깔끔하고 단단해 보여 사보의 취향이라 할 법한 범선이었다. 선장인 사보는 선수에 굳게 발을 딛고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서서 흥분이 가득 찬 얼굴로, 하지만 침착하게 항로를 계산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못할 범선은 그가 손을 뻗는 대로 아주 유연하게 내달려 수풀과 나무의 바다조차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좋은 배네. 빠진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얼굴에 햇볕이 제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사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이었지만, 그곳은 어쩐지 사보가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무 사이로 솟은 하얀 꽃이 배를 스칠 때마다 봉우리를 움츠렸다가 힘껏 꽃잎을 펼치며 향기를 자랑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측백나무가 푸르고 희게 돋은 나뭇잎을 뽐내며 가지를 흔들었다. 그 풍광이 고아하여 사보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토록 빼어난 풍경도 사보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사보는 매몰차게 느껴질 정도로 등을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배가 나무를 타고 오를수록 그가 잘 알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름만으로도 그리운 곳. 코르보 산이었다.

  루피가 떨어졌던 계곡과 셋이서 자주 악어를 잡아먹었던 강가, 곰이 튀어나왔던 동굴을 지나 나무 위 아지트에 이르러서야 배는 정박했다. 아지트에서 방문객을 반기듯 줄사다리가 사보의 발 앞에 좌르르 쏟아졌다. 사보는 누가 내려줬을까 궁금해하며 흔들리는 사다리를 탔다. 텅 빈 아지트는 에이스와 루피, 사보의 흔적이 가득했다. 에이스와 서로 더 크다며 다툼하여 벽에 그어놓은 금, 루피가 발바닥이 아프다고 울먹여 열심히 대패질한 바닥, 구석에 뭉쳐놓은 때 탄 이불이며 베개를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방울진 기억은 사보의 눈가에 아롱아롱 맺히는가 싶더니 뚝뚝 떨어졌다. 에이스와 루피의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짜증 내고 배고파하고 졸음에 겨워 꾸벅이는 얼굴이 차올라 사보의 발을, 무릎을, 어깨를 건드렸다.

  한참을 차오른 형제들 사이를 누비던 사보가 벌렁 드러누웠다. 눈가가 벌겋고 콧물을 훌쩍여 엉망진창인 얼굴이었지만 대자로 쫙 뻗은 사지가 통쾌했다. 눅눅한 목재의 감각이 망토 너머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야. 사보가 생각했을 때 갑자기 짙푸른 물이 사방에서 밀려들어 왔다. 도움을 청하려 입을 열자 짠 물이 입을 그득 채워 산소를 앗았다. 숨 쉴 수 없는 사보는 팔다리가 묶인 것처럼 반항도 하지 못하고 끝도 없이 깊은 바다로 가라앉았다. 차가운 해류가 여린 피부를 스치고 날카로운 상처를 만들었다. 몽글몽글 새어 나온 피가 공기 방울처럼 아득한 해수면을 향했다. 심해에 다다를수록, 가닥가닥 흔들리는 금발 사이로 빠져나가는 핏방울이 늘어날수록 통증은 강해졌다. 상처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느끼고서야 사보는 깨달았다. 이건 꿈이고,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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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3. 23:14 | 2차

* TO. 렐뢰님

* 로우루피TS

* 개그와 개그 같지 않은 그 사이 어딘가의 로우: 캐붕 주의!

* 브금은 BGM 버튼 누르면 나옵니다. 끌 때는 정지 버튼을 눌러주세요. 

* 모바일의 경우 빠른 템포의 곡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브금 재생을 멈춰주세요.







  포실한 벚나무는 흐드러지게 피어 낮잠 자기 좋은 그늘을 만들어 내었다. 따스한 햇볕 아래 적당히 달구어진 공기는 몰려오는 식곤증에 부채질했다. 로우는 어느새 잠든 모양이었다. 듬직한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세상 모르게 잠든 로우의 숨소리가 자장가같이 들려왔다. 하아암. 입을 한껏 벌리고 하품한 루피의 동그란 눈꼬리가 가볍게 젖어들었다. 시야 가장자리가 애매하게 번졌지만 몸뚱이는 손을 움직이기조차 귀찮을 정도로 축 늘어졌다. 어쩌지. 루피는 몽롱한 눈으로 고민하며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포만감과 포근함에 발그레해진 볼을 타고 굴렀다. 깨끗해진 시야가 무색하게 졸음에 뒤섞인 눈이 기어코 감겨들었다.


 자그만 머리가 여러 각도로 꾸벅이다가 로우의 어깨에 톡 떨어졌다. 갑작스레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에 로우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로우가 일어나자마자 루피와 나들이를 나왔다는 걸 기억해낸 것이 다행이었다. 긴장해 뻣뻣하게 굳어졌던 몸이 스르르 풀려 나무에 편히 기댔다. 그는 눈을 굴려 제 어깨에 얹힌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로우와 같은 색을 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그의 어깨며 목덜미에 내려앉아 있었다. 유약해 보이는 둥근 어깨가 조금씩 오르내릴 때마다 반팔 아래 드러난 로우의 갈색 피부에 미미한 콧김이 명지바람처럼 스쳤다가 물러가길 반복했다. 솜털같이 보송보송한 감촉에 목덜미가 간지러워진 로우가 공연히 뻑뻑한 눈을 비볐다.


 루피는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를 지나 서쪽으로 조금 기울어질 무렵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인 걸 보상하겠다는 듯이 쿨쿨 달게도 잤다. 혹여나 루피가 깰까 미동도 없이 자세를 유지하던 로우는 루피가 깊이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자 손을 꼼지락거렸다. 남자다운 손은 루피의 옷자락을 건드렸다가, 하얀 바지 아래로 쭉 뻗은 몽글한 허벅지를 쓸어 보았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든 얄미운 코를 아프지 않게 잡았다 놓았다. 자꾸 달라붙는 손길에 루피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몇 번 잠투정했지만 로우는 뻔뻔한 낯을 하고 제 연인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본 바람이 혼을 내듯 파르르 떨었다. 안온한 봄볕과는 달리 바람은 생각보다 서늘해서, 로우는 훤히 드러난 루피의 한쪽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들을 훼방 놓는 바람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불어와, 결국 루피가 깨고야 말았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로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빈 루피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오수를 즐긴 고양이처럼 나긋한 몸짓에 로우가 제 코를 부여잡았다. 한 번에 잠이 깬 루피가 그를 올려다보는 눈망울이 바다를 머금은 듯 울렁여서, 로우는 충동적으로 하얀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제 것이라고 도장을 찍고 올라온 얼굴엔 보이지 않던 붉은 길이 실금같이 가 있었지만, 여상스러운 일이기에 루피는 시시싯 웃고만 말았다.


 제 방해에도 찰싹 달라붙어 있는 커플이 아니꼬웠는지, 바람이 나무를 헤집어 놓았다. 다홍색 벚꽃잎이 함박눈처럼 송이송이 풀잎새로 내리앉았다. 절경이었다. 음식은 없지만 모처럼 보는 예쁜 광경에 마음이 끌린 루피가 로우의 품에서 벗어나 나무 아래를 폴짝폴짝 뛰었다. 로우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루피를 불렀다. 하지만 루피는 못 들었는지 한 귀로 흘려 버린 것인지, 망아지처럼 뛰어다닐 뿐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걸 삼킬 수 없어 이번에도 로우는 아쉬움을 담뿍 담아 어깨를 늘어뜨렸다.


 "섬세함이라곤 쥐뿔도 없다니…."

 "토라오!"


 드디어 잡았나. 꽃비를 배경으로 바동대던 하얀 몸체도 보기 좋았건만. 로우는 누가 들으면 팔불출이라 할 생각을 꾹꾹 누르며 활짝 웃는 루피를 보았다. 루피는 얼굴 가득 말간 웃음을 짓고 양손에 벚꽃을 들고 있었다. 꽃은 온전한 형체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로우는 미소를 돌려주었다. 한달음에 로우 앞에 다가온 루피가 꽃을 들어 보이며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쉽사리 잡히지 않은 꽃잎에 불만을 토로하나 싶어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 주던 로우는 뒤이어 나오는 말에 멈칫했다.


 "빨리 잡히라고 가지를 쳤더니 부러지지 뭐야!"

 "…그래서 꽃대가 멀쩡했군."

 "니시싯! 응! 이거 토라오 가져."


 루피는 대뜸 팔을 쭉 뻗어 로우의 귀에 벚꽃을 꽂아 주었다. 로우의 귀끝에 부드러운 손끝이 스쳤다. 위로 들어 올려진 모자가 머리 뒤로 떨어졌다. 로우는 모자를 내버려두고 가까이 다가온 루피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깜빡이면 바뀌어 버릴까 부릅뜬 눈 탓에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까맣고 큼지막한 눈동자가 위로 굴러가는 모습에 로우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다시 그와 눈을 마주치며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 로우의 망막 깊숙이 새겨졌다. 참아야 하나? 루피의 풍성한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락였다. 망설이지 말라고 하는 듯한 몸짓에 로우는 제 연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참을 필요 없지.


 코끝이 맞닿고 뭔가 말하려는 듯 열렸던 붉은 입술이 타의에 의해 막혔다. 바르작거리던 루피는 로우가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끌어당기자 힘을 빼고 늘어졌다. 낭창한 몸이 로우에게 감겨들고 손에 꼭 쥐고 있던 꽃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다시, 벚꽃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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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3. 00:10 | 2차

* 원피스 60분 전력: 주제 '변화'
* 검사기도 못 돌린 글이라 맞춤법과 비문 주의
* 해리포터 '소망의 거울' 소재




  어린 날의 내가 불퉁하게 서 있었다. 푸르딩딩한 눈가와 상처나고 부어 오른 볼이 망막에 맺혔다. 또 해적왕의 자식에 대해 논한 불량배들과 드잡이질했겠지. 굳이 기억의 무덤을 파헤쳐 떠올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시절의 나는 상처가 끊일 날이 없었으니까. 걱정이 흘러넘치다 못한 사보가 날 놓치면 큰 일이라도 날까봐 웬종일 내 뒤꽁무니를 쫓아 다닐 정도로 무모했었다. 지금이라고 그런 평을 받지 않는 건 아니지만. 괜히 신경질이 나 머리에 꿀밤을 먹이듯 거울을 때렸다. 아프지 않을 게 분명한 작은 '나'는 발을 쿵 구르고 힘껏 노려보았다. 웃기지도 않았다. 코웃음을 치고 거울을 선실 구석에 세워두었다. 이상한 거울을 상대할 시간은 없었다.

"에이스으으으!!!!"
"이런."

  마르코의 목소리가 온 복도에 우렁우렁 울렸다. 내 서류를 미뤄둔 게 들킨 모양이었다. 쳇. 책상에 뒤섞어 놨는데. 빨리 도망가야 했다.


*


  선실 문을 열자 끼익 소리가 났다. 마르코가 알면 기름칠 제 때 해 두라고 또 잔소리하겠지. 한숨이 푹 나왔다. 내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실에 발을 들였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가 남보랏빛으로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나마도 빛이 들지 않는 곳은 어두워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마르코에게 잡혀 몇 번이나 얻어맞은 등짝이 아직도 벌겋게 손자국이 나 있겠지. 누가 1번대 대장 아니랄까봐 혼낼 때도 무장색을 씌우나. 아버지의 문양을 문신으로 새긴 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매번 이렇게 맞았다간 남아나질 않았을 거였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불렀었는데. 보면 웃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조금 그러니까…. 언제쯤 자국이 사라질까? 확인하고자 거울로 향했다.

  실수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거울은 일반 거울이 아니었다. 판판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사보와 루피, 그리고 과거의 내가 서 있었다. 사이좋게 ASL이 쓰인 깃발을 들고 개구지게 웃는 낯은 너무나도 그리워서….

"…사보."

  코를 훌쩍 삼켰다. 이 망할 거울은 사람을 농락하는 건가.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악취미다. 이런 게 '소망의 거울'이라고? 손바닥과 맞닿은 거울이 싸늘했다. 그래. 사보가 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하지만 사보는 죽었다. 출항하려고 띄운 배 위에서, 17살이 되길 기다리지도 못하고 끔찍한 집구석에서 뛰쳐나온 사보는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았다. …죽은 사람은, 볼 수 없다. 이렇게 보아봤자 현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차가워진 손바닥과 달리 이로 눌러 압력을 받은 입술에서 뜨끈한 피가 흘렀다. 주먹쥔 손으로 피를 훔쳐내고 거울을 쾅 쳤다. 점점이 튄 피가 흘러내려 사보의 금발 위로 번졌다. 아차 싶어 황급히 다른 손으로 닦아냈지만 불그스름한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사보는 괜찮다는 듯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견딜 수 없어 사보에게 등을 보였다. 식힐 게 필요했다.

  화장실에 있는 거울은 멀쩡했다. 연거푸 세수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 비쳤다. 그 안의 나는 작디작은 사보와는 달리 다 큰 성인이었다. 여러 번 눈을 감았다 뜨고, 눈꺼풀이 쓰라릴 정도로 비벼도 사보를 두고 나이 먹은 난 변하지 않았다. 젠장할 거울. 선실에 있던 거울이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이걸 준 선원이 뭐라고 했더라? 소망을 보여준다고 했었나? 가물가물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게 그런 거울이라 친다손 해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소원을 뭐라고 생각하길래 이런 게 비춰지는 건지. 흰 수염을 해적왕으로 세운다. 그것이 내 꿈이었다. 확실한 미래이자 단 하나의 소망이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보고 싶다면 사보뿐만이 아니라 내… 어머니도, 나왔어야만 했다.

  그러니 이 멍청한 거울은 망가진 게 틀림없었다. 소원이니 소망이니, 그딴 건 전부 램프의 지니 같은 헛소리였다. 박살낼까 하다가 배 위에서 거울을 깨면 좋지 않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제일 가까운 섬도 두 주는 족히 걸리는 거리에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거울을 뒤집어만 두었다.


*


  마침내 물자 보급을 위해 섬에 정박했다. 그 사이 몇 번이고 보고 싶은 욕망을 내리눌러야 했다. 사보의 사진 한 장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기억 속에 있던 사보가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라 꿈까지 꿀 정도였다. 하지만 보내 주어야 했다. 그게 맞는 거니까. 맞는 거지만…. 아무튼 긴 항해동안 겨우 참았다. 이제는 내다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거울을 돌려 들었을 때, 나는 또 마주해야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였다. 큼지막한 의자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곁에는 대장들이, 또 다른 형제들이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나도… 있었다. '나'는 삿치와 어깨동무를 하고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동시에 형제들이 제각기 여상스러운 모습으로 웃거나 손을 흔들거나 하며 내게 인사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내 소망?

  그들에게 밝은 낯을 돌려주기도 전에, 손에서 거울이 미끄러졌다. 와장창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 거울의 조각이 선실 바닥에 흩어졌다. 서둘러 커다란 조각을 들여다 보았지만 한 부분만으로는 내 얼굴만 비출 뿐이었다. 무언가 놓친 느낌이었다. 발등에 떨어지는 액체의 느낌에 파편을 내려두고 손을 살폈다. 이미 오랜 기간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은 고작 거울에 다쳤다고 속살을 보이지 않았다. 피는 아닌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목재에 알알이 박힌 먼지같은 파편 위로 짙은 색의 동그라미가 생겨났다. 나, 울어…?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놓친 그 사이 어딘가에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게 분명한 감정에 나는 그저 거울을 쓸어담을 뿐이었다. 언젠가 깨달으리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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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2. 21:12 | 2차

* 현대 AU
* 약한 얀데레 주의




  띠리-. 에이스는 짧은 문자 착신음이 끝나기도 전에 화면을 켰다. 불 꺼진 방에 유난히 하얀 화면이 에이스의 얼굴을 밝혔다.

[오늘 회의가 길어지네.]

  달칵. 화면이 까매졌다. 달칵. 다시 환해졌다. 사보와 에이스, 루피의 얼굴이 사이좋게 나온 사진을 배경으로 한 잠금화면은 여전히 보란 듯이 문자를 띄우고 있었다. 드디어 그 문자가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에이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글자를 한 자씩 짚으며 문자를 읽었다. 내용은 그대로였다. 웅크려 앉아 있던 에이스는 휴대폰을 꽉 쥐고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노란 고무로 된 케이스가 일그러지며 불쾌한 소음을 냈다. 허벅지와 배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꺼져가던 휴대폰이 또다시 빛을 발했다. 

 [미안 늑ㅈ겠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황소바람이 들이닥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더욱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에이스는 얼굴을 마구잡이로 구기고 무릎에 머리를 몇 번이고 부딪혔다. 뇌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처럼 머리가 울렸다. 그래도 그 안 가득히 자리를 차지한 건 사보의 문자였다. 야속한 문자 아래의 사진은 행복한 시간에 멈추어 있었다. 작년 겨울, 대학 입학을 축하하며 파티를 벌인 날이었다. 환하게 웃는 사보의 얼굴에 에이스의 시선이 붙잡혔다. 저 때만 해도…. 에이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에이스와 사보, 그리고 루피는 형제지간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사보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아주 어릴 때 고아가 된 에이스는 기묘하게도 범죄자인 아버지를 잡아넣었다고 알려진 경찰, 가프에게 안겨 다단에게 맡겨졌다. 다단은 썩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작은 보육원을 그럭저럭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선 어린아이들에게도 부득불 할 일을 나누어주곤 했는데, 할당량을 마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겠다느니 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힘없는 아이들은 질색하면서도 굶기 싫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크자마자 에이스는 최소한의 일만 마치고 후미진 길거리를 나돌았다. 오래 눌러 앉아있으면 일거리만 늘여 주는 다단과 함께 있느니 다소 험악한 꼴을 보더라도 밖에 있는 게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 거리에서, 에이스는 사보와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땐 서로 잡아먹을 듯 굴었다. 뒷골목에서는 얕보이면 그대로 바닥까지 찍어 눌러지기에 십상이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어른들 허리춤에도 못 오는 아이들끼리는 첫인상이 쉬워 보일수록 숨을 죽이고 뒤통수 칠 틈을 노리곤 했기에 더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비슷한 실력을 갖춘 두 소년은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치고받는 날이 점차 줄어들고,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부루퉁하고 뾰족한 소년과 실없어 보이지만 단단한 소년은 통하는 데가 많았다. 결국 둘은 의기투합하여 같이 다니게 되었다. 혼자서도 웬만한 성인은 때려눕히던 패기 넘치는 소년들이었다. 뭉치니 두려울 게 없었다. 말 잘못 뱉으면 무는 미친개들이라고 소문이 거하게 퍼졌다. 그들의 악명은 나날이 높아졌다.

 '야. 넌 후회 안 해?'
 '뭐를?'
 '나랑 만난 거.'
 '후회? 푸하하하!'

  사보는 한참을 웃었다. 갑자기 터진 웃음에 비웃느냐며 에이스가 성을 내든 말든, 대답도 없이 하도 웃어 꺽꺽대기까지 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한참을 지나 에이스가 사보를 발로 차고 나서야 그는 대답했다.

 '안 해. 절대로.'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을 만큼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후로 보육원에 루피가 맡겨지고,(에이스는 멀쩡한 보호자가 있는 애를 왜 이런 데다 맡기나 했지만. 그는 하여간 이상한 할아범이라고 욕을 했다) 안 좋은 일에 휘말린 사보 역시 보육원에서 같이 자라게 되었다. 나이가 어린 루피는 시기가 다르긴 했지만, 그들은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다른 학교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에이스와 사보는 대학교까지 같은 곳을 가 다른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떨어지곤 못 사냐? 그러다 둘이 사귀겠다!' 

  그 농담에 사보는 실실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럼 축하해 줄 거지?'

 전부 멍해져 있던 친구들은 이내 사보의 등을 두들겨대며 낄낄댔지만, 에이스는 어쩐지 어릴 때의 일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멀뚱히 서 있던 그를 끌어당긴 사보가 환한 표정으로 어깨동무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러나 대학교에 와서야, 그들은 떨어지게 되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소속 때문이리라. 둘은 학과가 달랐다. 따라서 소속된 동아리도 달랐고, 아는 동기도, 선배도, 행동반경도… 많은 것들이 하나씩 달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끝없이 가까워졌던 과거와는 달리 차이가 벌려졌다. 사이는 멀어지지 않았지만 바라보는 방향이 틀어졌다. 숨결마저 닿을 정도로 가깝던 그들은 가운데에 거대한 크레바스를 두게 되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에이스는 손끝으로 휴대폰 화면에 있는 사보의 얼굴을 덧그렸다. 사람과는 달리 차가운 온도가 묻어나왔다. 그놈의 동아리. 짓씹은 말이 입술 사이로 비져나왔다. 계속 만지고 있던 화면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에이스도 그 화면에 붙들려 있었다. 그의 웃음도. 그의 마음도. 

  사보와는 달리.

  사보는 도마뱀인지 드래곤인지 하는 이름 요란한 교수에게 홀딱 넘어가선 3월도 채 지나기 전에 운동권 연합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 후로 자주 늦기 시작했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간다는 OT와 MT 정도라면 에이스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졸업생을 만난다, 다른 학교 회원을 만난다, 회의가 있다며 밤을 꼴딱 새우는 걸 예사로 삼았다. 에이스가 크게 화를 내며 이럴 거면 뭐하러 같이 자취하느냐고 하고 나면 잠잠해지는 것 같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귀가가 조금씩 늦어지기 시작했다.

  에이스는 여전히 위에 떠 있는 문자를 읽었다.

 "미안, 늦겠다? 허. 오타도 내고. 문자 하나 제대로 할 시간도 없다 이거지. 미안하긴 해?"

  실컷 비아냥거리며 숨을 씩씩대고야 에이스는 휴대폰 상단에 있는 시계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오후 11시 59분을 표시하던 시계는 에이스가 한 번의 호흡을 마치기도 전에 오전 12시로 바뀌었다. 에이스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휴대폰은 장판을 미끄러져 냉장고 옆에 처박혔다. 노란 케이스가 사보의 금발과 닮아 있었다. 이렇게 늦는 사보는 붉은 색의 케이스를 끼운 휴대폰을 들고 있으리라.

  에이스는 팔이 떨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불규칙적으로 내뱉어지는 거친 숨이 야밤의 차가운 바람과 뒤섞였다. 살이 에이는 듯한 바람이 에이스의 머리에 날카롭게 파고 들어왔다. 불과 같은 감정이 표면만 식어 냉정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싸늘한 머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떠올렸던 발상을 실행해야 할 때라는 걸 알려왔다. 

  단단히 결심한 에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보가 올 새벽까진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


  사보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단정하게 깎인 손톱은 네모난 모양임에도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회의가 있다고 문자를 보낸 지 4분. 그의 휴대폰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책상에 반복적으로 손톱자국을 내던 손이 멈추었다. 그 상태로 휴대폰에 빠질 것처럼 들여다보는 사보를 코알라가 타박했다. 

 "정말, 매번 회의 끝나고 꾸무럭거려!"
 "하핫. 미안, 미안."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난 사보가 한 손으로 책상 위의 서류를 끌어모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은 바쁘게 휴대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동생 바보는 못 말린다니까. 사보가 기다리는 상대가 루피라고 착각한 코알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떴다. 물론 사보는 별 반응 없이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아까 전보다 급해 보이도록 만든 문자는 금세 완성되었다.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사무적인 안내창이 떴다가 사라졌다. 배경화면엔 말갛게 웃는 에이스와 루피가 손가락을 쫙 펴고 사보를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사보는 에이스의 볼 부분을 쿡 찔렀다. 생각과는 달리 딱딱한 표면이 그를 반겼다. 화면 안의 에이스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매여 있었다. 사보가 무엇을 하든 에이스는……. 큭. 미처 숨기지 못한 웃음이 실낱같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미약한 흔적은 서류의 팔락임에 먹혀 언제 내보였느냐는 듯 흩어져 공기에 퍼졌다. 대체로 웃는 낯인 사보기에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첫 문자를 보낸 지 7분. 여전히 답장은 없다. 사보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어느새 12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에이스는 초조해서 몸이 달아 있을 게 분명했다. 폭발할 때가 지척이었다. 만족스럽게 입매를 비틀어 올린 사보가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순서가 얽힌 서류를 정리했다. 얇은 종이가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머릿속에 든 계획도 사박사박 성공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부탁할게, 사보!'
 '응. 잘 가.'

  그것이 두 시간 전이었다. 사보는 책상에 놓인 휴대폰을 빙빙 돌리며 침묵에 잠긴 동아리방을 둘러보았다. 한 학기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여름 방학에 들어설 때까지 에이스와 함께 사는 자취방만큼이나 익숙해진 공간이었다. 어떤 일에나 열심이었던 사보는 보통 마지막으로 동아리방에 남곤 했는데, 사람들은 사보가 늦게까지 남아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사보의 훌륭한 언변과 그가 애써 유지한 친근한 인상 덕분이었다. 그래서 지난 다섯 달 간, 학생회관 3층에 자리한 이 방은 사보에게 있어 쓸만한 기지이자 수단이 되어 왔다. 그 역할은 머지않아 소멸하리라고, 사보는 확신했다.

  휴대폰이 부르르 떨며 그 위에 얹혀 있던 사보의 손을 자극했다. 가물가물한 눈이 기다리던 알림에 번쩍 뜨였다.

[언제 와?]

  불퉁한 에이스의 어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아 사보는 절로 나오는 미소를 막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동아리방은 그가 제 감정을 마음껏 내보이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양손으로 휴대폰을 단단히 붙든 사보가 책상에 상체를 얹으며 팔을 쭉 뻗었다. 시원한 목재의 감촉이 얇은 티 하나 너머로 느껴졌다. 사보는 미동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버텼다. 일 분, 이 분…… 시간이 거북이같이 기었다. 막 삼 분이 되었을까, 드르륵, 진동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문자가 아니었다. 화면 중앙에 오래도록 보아 온 얼굴이 떴다. 에이스, 하고 어떤 장식도 없는 이름이 그 아래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사보는 자꾸 초록색 수화기 아이콘으로 향하는 손가락을 저지해야만 했다.

  전화는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왔다. 배터리가 얼마쯤 닳았을 때, 사보는 작게 말을 해 보았다. 에이스. 두 시간이 넘게 수분을 받지 못한 성대는 바짝 말라 자다 깬 목소리가 났다. 새벽 늦게 잠들어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 같았다. 사보는 드디어 손가락을 놓아 주었다. 초록색 수화기가 중앙으로 당겨지자마자 휴대폰에서 커다란 소리가 튀어 올랐다.

"야!!!"

  눈을 둥글게 휜 사보는 숨을 느릿하게 내쉬었다. 전화 건너편에서 흐르는 목소리가 쑥 내려앉았다.

"아파?"

  곧장 나오지 않는 대답이 그를 초조하게 한 모양이었다. 사보! 아프냐고! 사보? 듣고 있어? 걱정 어린 감미로운 목소리가 사보의 이름을 다섯 번은 부르고 나서야 사보는 입을 떼었다. 아-. 그 작은 소리에 에이스가 조용해졌다. 들숨. 날숨. 얼마나 조용한지 마이크를 통해 에이스의 숨소리가 사보에게 전해질 정도였다. 한껏 아쉽다는 표정으로 사보는 휴대폰을 입 가까이 댔다. 그렇게 하면 에이스의 숨이 그의 입으로 들어갈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이제는 성인이 된 두 남자가 숨을 맞추었다. 옅은 숨소리는 한 사람이 호흡하듯 겹쳐졌다. 평소라면 재촉했을 에이스도 오늘은 어쩐지 조용하여, 사보는 오래도록 그 고요를 즐길 수 있었다. 그래도 인내심이 약한 쪽은 에이스였다. 그는 여지없이 이 평화로운 이음을 끊어내었다.

 "사보, 자?"
 "…미안, 에이스. 좀 졸려서."
 "그러니까 왜 거기서 버티고 있는데!"
 "회의가…."
 "하루 이틀이지! 방학이라고! 새벽까지 있을 필욘 없잖아? 빨리 와."

  집으로. 그 말이 달콤해 사보는 눈을 감고 고개를 깊숙이 끄덕였다. 노예가 제 머리에 올라앉은 주인에게 경배하듯 경건한 표정이었다. 에이스는 결코 보지 못할 그것이었다.

 "금방 갈게."
 "응. ……사보."
 "어?"

  에이스는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었다. 주저함일까? 초조함? 사보는 어느 쪽이든 좋았다. 각본대로 되어 간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기에. 한편으론 싫기도 했다. 에이스의 섬세한 표정, 작은 몸짓을 놓치기 때문이었다. 전화로는 에이스의 일부분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니야. 끊는다."
 "알았… 끊었네."

  달아오른 전화기는 손이 델 듯 뜨거웠지만 사보는 손을 떼지 않았다. 유난히 체온이 높은 에이스와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휴대폰이 그의 체온만큼 식고 나서야 사보는 버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따끈하게 데워진 손바닥이 피부에 열기를 전했다. 사보는 눈을 감았다. 큼직하고 남자다운 손 아래 부드러운 입술이 양쪽으로 길게 찢어졌다. 오래도록 공을 들여 완성에 이를 작품을 보는 예술가처럼 보였다. 사보는 아무도 그의 표정을 온전히 볼 수 없도록 손을 꾹 눌렀다. 그런데도 폭소가 터졌다. 누르는 힘만으로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오래도록 웃어젖힌 사보가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은 기쁨과 함께 손을 적시고 휴대폰 화면에 자국을 남겼다. 물기 어린 화면은 시계를 띄웠다. 새벽 3시 20분. 돌아갈 때였다. 

  에이스가, 준비하고 기다리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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