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16. 23:40 | 2차


* 사보 출항 직후의 이야기
* 개인적 생각과 과거 날조 주의
* 150615 등록. 150616 내용 추가 및 수정.




  천룡인에게 사람은 길가의 돌멩이와 같았다.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한다는 점이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사람'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장난감일 뿐이었다. 개돼지만도 못한, 저들끼리 번식하고 자라나는 들짐승이었다. 그래서 하늘과 같은 천룡인은, 그의 길을 막는 눈엣가시를 방아쇠를 당기는 아주 간단한 행동만으로 치워 버렸다.

  사건은 거대한 손길을 인지하고 저항해 볼 결심을 품기도 전에 일어났다. 꿈꾸던 소년에게 성큼 다가온 것은 너그럽지 않은 현실이었다. 사보가 몰래 훔쳐냈던 낚싯배에 그동안의 악행을 벌하듯, 철퇴를 닮은 둥그런 저승사자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불만을 외칠 틈도 없이 두 번째 철퇴가 뱃전을 내리쳤다. 배는 바다 사방으로 살점과 같은 조각을 흩뿌렸고 그 잔해 또한 이어진 폭발에 그슬려 멀쩡한 것이 하나 없었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판단한 참상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바다에서 사보를 구해냈을 때, 피투성이 아이는 가느다란 숨결을 할딱이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서 사보를 보았던 이완 코브는 끈질긴 목숨에 경탄을 표했다. 돛단배보다 작고 더 상하기 쉬운 열 살배기 꼬마 아이는 물에 잠겼다 나왔는데도 채 씻겨 나가지 않은 피에 절여져 있었다. 목재의 파편이 박히고 대포의 화마가 피부를 휩쓸어 멀쩡한 곳이 없었다. 혁명을 꿈꾸는 어른들은, 저 아이가 살아난다면 그거야말로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사보는 눈 한 번 뜨지 않고, 손가락 하나 놀리지 않고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관심과 걱정과 흥미부터 쓸데없이 물자를 낭비하는 빈대를 보는 사나운 눈길까지 온갖 감상이 뒤섞여 사보를 눌렀다. 그 탓인지, 혹은 본디 죽어야 마땅할 부상 탓인지 사보의 용태는 점점 나빠져만 갔다. 식은땀으로 매트리스를 적시는 건 하루에도 여러 번 있었고, 발작은 의사가 마음을 놓으려 하면 일어났다. 미래의 혁명군이 탄 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많은 물자를 보급할 여유는 없었고, 따라서 배에는 사소한 의료품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보는 기본적인 처치만으로 끈덕지게 숨을 이었다. 작은 몸에 얼마나 많은 피가 들어 있는지 붕대에 스며들다 못해 밖으로 새어 나오는데도 버티는 생명이 눈물겨웠다.

  바르티고에 이르기까지 긴긴 항해에서 사보는 몽롱한 의식으로 꿈을 꾸었다. 상처가 짓무르고 뼈가 조각나는 고통에 현실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꿈에서 거침없이 발을 내디디고 호기심에 차 구경하며 보내는 초 단위의 시간마다 저도 모르게 사보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무섭기 짝이 없는 현실과는 달리 꿈은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차마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아름다움으로 사보를 끌어당겼다.

  사보는 배를 타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맑은 호수를 지나 반짝이는 녹음으로 항해했다. 사보의 해적선은 아주 커다래서 마치 그가 전에 보았던 천룡인의 배 같았다. 그러나 화려하고 욕심만 채우는 천룡인의 배와는 달리, 날렵해 보이는 몸체가 깔끔하고 단단해 보여 사보의 취향이라 할 법한 범선이었다. 선장인 사보는 선수에 굳게 발을 딛고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서서 흥분이 가득 찬 얼굴로, 하지만 침착하게 항로를 계산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못할 범선은 그가 손을 뻗는 대로 아주 유연하게 내달려 수풀과 나무의 바다조차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좋은 배네. 빠진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얼굴에 햇볕이 제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사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이었지만, 그곳은 어쩐지 사보가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무 사이로 솟은 하얀 꽃이 배를 스칠 때마다 봉우리를 움츠렸다가 힘껏 꽃잎을 펼치며 향기를 자랑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측백나무가 푸르고 희게 돋은 나뭇잎을 뽐내며 가지를 흔들었다. 그 풍광이 고아하여 사보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토록 빼어난 풍경도 사보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사보는 매몰차게 느껴질 정도로 등을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배가 나무를 타고 오를수록 그가 잘 알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름만으로도 그리운 곳. 코르보 산이었다.

  루피가 떨어졌던 계곡과 셋이서 자주 악어를 잡아먹었던 강가, 곰이 튀어나왔던 동굴을 지나 나무 위 아지트에 이르러서야 배는 정박했다. 아지트에서 방문객을 반기듯 줄사다리가 사보의 발 앞에 좌르르 쏟아졌다. 사보는 누가 내려줬을까 궁금해하며 흔들리는 사다리를 탔다. 텅 빈 아지트는 에이스와 루피, 사보의 흔적이 가득했다. 에이스와 서로 더 크다며 다툼하여 벽에 그어놓은 금, 루피가 발바닥이 아프다고 울먹여 열심히 대패질한 바닥, 구석에 뭉쳐놓은 때 탄 이불이며 베개를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방울진 기억은 사보의 눈가에 아롱아롱 맺히는가 싶더니 뚝뚝 떨어졌다. 에이스와 루피의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짜증 내고 배고파하고 졸음에 겨워 꾸벅이는 얼굴이 차올라 사보의 발을, 무릎을, 어깨를 건드렸다.

  한참을 차오른 형제들 사이를 누비던 사보가 벌렁 드러누웠다. 눈가가 벌겋고 콧물을 훌쩍여 엉망진창인 얼굴이었지만 대자로 쫙 뻗은 사지가 통쾌했다. 눅눅한 목재의 감각이 망토 너머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야. 사보가 생각했을 때 갑자기 짙푸른 물이 사방에서 밀려들어 왔다. 도움을 청하려 입을 열자 짠 물이 입을 그득 채워 산소를 앗았다. 숨 쉴 수 없는 사보는 팔다리가 묶인 것처럼 반항도 하지 못하고 끝도 없이 깊은 바다로 가라앉았다. 차가운 해류가 여린 피부를 스치고 날카로운 상처를 만들었다. 몽글몽글 새어 나온 피가 공기 방울처럼 아득한 해수면을 향했다. 심해에 다다를수록, 가닥가닥 흔들리는 금발 사이로 빠져나가는 핏방울이 늘어날수록 통증은 강해졌다. 상처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느끼고서야 사보는 깨달았다. 이건 꿈이고,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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