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18. 04:05 | 2차


* 루피 TS

* 로우 캐붕 주의





  로우는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나직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멋스럽게 나오는 것 같았다. 각이 잘 잡힌 까만 정장도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고, 손에 든 장미꽃도 싱그럽게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든 작은 상자도, 두말할 것 없이 반짝이리라. 로우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선명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훗. 태양마저 부러워 할 정도라니. 로우의 입꼬리가 귓가에 매달릴 듯 치솟았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상대만 오면 된다.


  그러나 루피는 약속 시각이 넘어서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로우는 미간을 모으고 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행여나 정장에 주름이라도 잡힐까, 구두에 먼지라도 묻을까 모든 행동을 조심했다. 한낮의 땡볕은 나무 그늘로 가리기엔 지나치게 뜨거웠다. 갈색 얼굴을 따라 긴장과 걱정, 초조함이 얽혀 땀과 함께 흘러내렸다. 삼십 분이 지나도록 루피의 목소리는커녕 여자의 구두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 달 넘게 고심해 준비했던 이벤트가 무산될 것 같은 기분에 로우는 평소보다 빨리 인내를 잃고 말았다. 사실 루피와 얽히면 언제건 그렇게 되곤 했다.


 "대체 왜 안 오는 거란 말이냐, 밀짚모자야!" 


  발을 쾅 구르고 속내를 토해내자 손에서 불길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계획을 짜며 미리 상상해 보았던 끔찍한 미래가 완벽한 준비라는 댐을 무너뜨리고 홍수처럼 로우의 머리에 범람했다. 선탠이라도 한 것 같이 건강미가 넘치던 얼굴이 삽시간에 파랗게 질렸다. 벌벌 떨며 내려다본 꽃은 줄기가 똑 부러져 꺾여 있었다. 비닐 포장 안에 곱게 장식되어 있던 연보라빛 색지도 엉망으로 구겨져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지. 어떡하지. 눈동자가 정신없이 돌아가며 꽃집을 찾았다. 하지만 약속 장소는 공원이었다. 꽃집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절망하는 로우에게 때마침 두 번째 불행이 몰아쳤다.


 "토라오!!"


  루피가 환하게 웃으며 로우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풀어지는 로우의 입매가 두말할 것 없이 팔불출의 그것이었다. 로우는 연인의 웃음에 현 상황을 몽땅 잊어버리고 루피에게 다가서려 했다. 연이어 발생한 불행에 안타까웠는지 운 좋게도 장미꽃 포장에서 난 바스락 소리가 그를 멈춰세웠다. 제정신이 돌아온 로우가 바닥에 붙박인 듯 섰다. 루피는 그가 자신에게 뛰어들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곤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바람이 탄식하듯 로우 주변을 휘몰아쳤다.


  하필 지금! 오전 내내 보고 싶었던 얼굴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로우는 고함을 내지르려는 입을 가까스로 닫고 머리를 굴렸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 참상을 루피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꽃을 보고 궁금해하면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까지 들킬지도 몰랐다. 로우는 찢어지는 마음을 끌어안고 장미꽃을 나무 뒤로 홱 던졌다. 부러진 꽃은 나무 뒤 수풀로 쏙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뭐야?"


  동그란 눈이 데굴 굴러 나무 기둥으로 향하자 로우가 황급히 시야를 막아섰다. 루피의 얼굴이 아까와는 반대 방향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작은 상자가 든 주머니가 무거워져 로우는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크흠. 아무것도 아니다."


  강제로 미소를 만들어낸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식은땀이 그의 등을 축축하게 적셨고 손동작은 로봇에 비견될 정도로 딱딱했다. 눈꼬리는 애매하게 접혀 웃는지 우는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괴상한 몰골이었다. 누가 봐도 숨기는 게 분명한 행동이었지만 눈치 없는 루피는 그저 잘 모르겠다는 듯 로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루피가 고민에 빠져 입술을 볼록 내밀자 보기 좋게 붉은 입술이 돋보였다. 로우가 크게 숨을 삼켰다. 한 단어가 뇌리를 가득 차지했다.


 "이상한데…."

 "결혼해… 헛!"

 "어엉?"


  이번엔 하얗게 뜬 얼굴이 일그러졌다. 못 들었겠지. 로우가 그렇게 위안 삼으려는 찰나 루피가 폭탄을 터뜨렸다.


 "아하. 결혼하자고?"


  눈을 접어 산뜻하게 웃는 루피는 궁금증이 풀려 시원한 기색이었다. 손바닥을 주먹으로 통 두드리는 모습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뜨거운 것이 주룩 흐르는 감각에 로우는 코를 틀어막았다. 심장이 바삐 뛰어 쿵쿵쿵, 일정한 박자로 그를 울렸다. 멍한 로우의 귀에 그들을 축복하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밀짚모자야가 궁금해하지 않는 걸 보아 환청인 게 틀림없다. 이성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착실히도 움직였다.


 "그래."


  로우는 루피의 발밑에 피어 있던 민들레를 두어 송이 꺾어 포켓치프로 감싸 들었다. 장미꽃 대신 만들어진 조그만 꽃다발은 소탈한 루피와 잘 어울렸다. 여기저기 구겨지고 나뭇잎도 붙어 있는 정장을 입은 로우가 레이디를 모시는 기사의 맹세를 하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결혼하고 싶다."


  주머니에서 잠들어 있던 케이스가 로우의 조심스러운 손길과 함께 바깥에 몸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가죽 케이스가 묘한 크림슨을 띄었다. 루피는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없이 로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런 얼굴이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코피의 흔적이 여실한 낯으로 로우는 저 좋은 결론을 내렸다. 루피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드는 건 진작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우가 기대에 반짝이는 눈을 하고 그 케이스를 열려고 할 때였다.


 "맞아!"


  루피가 기습적으로 로우의 머리를 내리쳤다. 로우는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점차 가까워지는 바닥을 보며 케이스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멀어져 가는 의식의 틈으로 루피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보가 그랬거든. 토라오가 무릎 꿇고 상자 내밀면 이렇게 하라고! …근데 왜지?"


  이 와중에도 목소리가 꾀꼬리 같군…. 그 상념이 마지막이었다.





* 사보의 농간~감히 내 여동생을 노리느냐~


"루피, 그 표범 자식이 그러거든 확 머리를 갈겨!"

"응? 왜?"

"그렇게 한다고 하면 고기 많이 사 줄게."

"좋아! 꼭 때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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