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19. 02:18 | 2차


 낡은 회색 벽돌으로 이루어진 긴 회랑은 을씨년스러웠다. 드문드문 설치된 가스등 안에서 희미한 불꽃이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하며 춤추었다. 루피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슬리퍼 소리가 차가운 벽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그 외엔 누군가 소리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막했다. 하다못해 가스등 특유의 공기 새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별 이상을 느끼지 못한 루피는 계속 걸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벽돌 사이사이에서 피어난 넝쿨이 비쩍 마른 노파의 손가락처럼 그 줄기를 곳곳으로 뻗치고 있었다. 진한 회색 넝쿨은 그대로 석화되어 벽면 전체에 기묘한 문양을 그렸다. 재미있는 곳이네. 제 말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제야 루피가 입술을 오므렸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멀찍이서 무거운 발소리가 돌풍과 함께 불어왔다. 루피는 고개를 치들고 귀를 기울였다. 질질 끄집는 듯한 소리는 점차 멀어지는지 작아지고 있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루피가 다급히 왼발을 뻗었다. 다시 오른발, 왼발. 드러난 발엔 상처가 가득했다. 맹풍을 가를 때마다 슬리퍼가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처럼 흔들렸다. 어느새 바람은 바늘로 구성된 것처럼 따갑게 루피의 피부를 찔렀다. 따가운 자리마다 땀과 피가 섞인 방울이 살갗에 머물렀다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발을 아무리 강하게 박차도 속도가 붙기는커녕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래도 루피는 멈춰 서지 않고 달렸다. 그는 손을 놓아버리고 가만히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것이 언제건 간에. 아직까지 그 사실은 변치 않았다.


  한참 달리다 보니 바람이 멎었다. 부릅뜬 눈이 익숙한 등을 찾았다. 어? 루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등에는 흰 수염의 문장이 뚜렷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루피가 지금껏 보아 왔던 것과 달리, 그 등은 굽어 있었다. 끌려가는 죄인 같았다. 손과 다리, 어디 하나 묶인 곳이 없는데도 원치 않는 길을 걸어가는 가축처럼 보여 루피는 소리를 질렀다.


  에이스! 에―이―스!! 성대를 잘라내 버린 듯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루피는 끊임없이 이름을 부르짖었다. 에이스를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채웠다. 에이스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 가는 거야! 시린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워 루피는 몇 번이고 넘어졌다. 무릎이 깨지고 이마에서 피가 솟았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시야가 두 개로 나뉘었다가 합쳐졌다. 새로 생긴 게 분명할 상처인데도 언젠가 이미 느꼈던 감각이 정신을 뒤흔들었다. 루피는 벽을 짚고 겨우 걸었다. 바싹 마른 넝쿨이 힘을 줄 때마다 부스러졌다.


  에이스는 이미 멀어져 곧 사라질 것 같았다. 루피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새까만 신발의 밑창이 끈적이는 걸 밟아 나가듯 쩌억 쩌억 소리를 내며 복도에 붙었다 떨어졌다. 설핏 보이는 종아리가 유난히 희었다. 선뜩한 느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에이스를 처음 만난 일곱 살의 어린 날처럼, 루피는 엉엉 울어버렸다. 그는 애단 마음에 헛손질하면서도 타일 틈새에 손을 끼워 넣고 기었다. 가지마. 가지마, 에이스.


 "에이스!!"


  회랑이 침묵했다. 가스등마저 그 불을 삭였다. 그림자가 온 복도를 덮을 듯이 면적을 넓혔다.


 "두고 가지 않는다며!"


  그러나 다 자라지 못한 아이의 그림자는 너무도 짧아서.


 "가, 가지 마! 흐어어엉… 에이스으!!"


  남자면 울지 말라고 얘기해 달란 말이야. 다시 커진 불꽃에 그림자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어느덧 에이스의 형체는 사라져 있었다. 루피는 몸을 옹송그렸다. 바닥에 납작 달라붙은 몸은 꼭 회랑의 일부처럼 보였다. 숨을 죽인 아이가 침잠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가스 새는 소리가 들렸다. 위태롭게 일렁이던 가스등의 유리가 펑 터지더니, 저 멀리서부터 연이어 터져 불꽃이 튀었다. 삽시간에 광대한 불의 바다가 펼쳐졌다. 천장을 뒤덮었던 화마는 날카롭게 세운 발톱을 한 용의 모양으로 사뿐히 땅에 내렸다. 루피는 조각이라도 된 마냥 미동도 없었다.


  짐승은 발톱을 숨기고 바닥에 떨어진 밀짚모자를 주웠다. 웅크린 조각상에 다가가는 걸음마다 까만 망토가 부드럽게 날렸다. 계속해서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은 종종 불티를 날렸으나 어디에도 상처입히는 일 없이 사라졌다. 루피와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인간의 상을 취했다. 마침내 루피의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말쑥한 남성의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루피. 상냥한 목소리는 루피의 귀에 닿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린 그가 루피의 머리에 밀짚모자를 씌워 주었다. 루피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눈을 뜨지 않았다. 까만 장갑을 낀 손이 루피의 말랑한 볼을 잡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마법을 부렸다. 루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번엔 다른 감정이 방울져 까만 장갑 위를 굴렀다.


 "사보…. 사보야?"

 "안녕, 루피."


  애정 어린 미소가 대답하자 폭포수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꺽꺽대는 비통 사이로 간신히 몇 마디가 새어나왔다. 사보. 사보… 에이, 에이스가…. 나…. 차마 단어를 이루지 못한 글자가 가슴을 할퀴었다. 아직도 울보구나? 루피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사보가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아직 이 형이 있잖아."


  듬직한 얼굴 뒤로 놓쳐버린 웃음이 떠올라 루피는 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마주 끌어안은 사보가 루피의 등을 다독였다. 그가 진정하도록, 아주 다정한 움직임이었다. 불꽃처럼 따스한 사보의 몸은 위안이었다. 


  에이스…. 사보의 어깨에 코를 박은 루피가 웅얼거렸다. 잊을 수 없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동시에 루피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안도가 지저에서부터 색을 입혔다. 루피, 다음에 만나자. 사보는 부어오른 눈가를 살며시 쓸어주었다. 루피가 끄덕이자 사보는 다시 화염을 품은 용이 되어 회랑을 날았다. 루피는 제 힘으로 일어서 사보를 지켜보았다.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깨진 가스등이 되돌아와 환한 빛을 냈다. 이번에는 색을 가진 채였다. 모노톤의 회랑이 천천히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보드라운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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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8. 04:05 | 2차


* 루피 TS

* 로우 캐붕 주의





  로우는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나직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멋스럽게 나오는 것 같았다. 각이 잘 잡힌 까만 정장도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고, 손에 든 장미꽃도 싱그럽게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든 작은 상자도, 두말할 것 없이 반짝이리라. 로우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선명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훗. 태양마저 부러워 할 정도라니. 로우의 입꼬리가 귓가에 매달릴 듯 치솟았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상대만 오면 된다.


  그러나 루피는 약속 시각이 넘어서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로우는 미간을 모으고 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행여나 정장에 주름이라도 잡힐까, 구두에 먼지라도 묻을까 모든 행동을 조심했다. 한낮의 땡볕은 나무 그늘로 가리기엔 지나치게 뜨거웠다. 갈색 얼굴을 따라 긴장과 걱정, 초조함이 얽혀 땀과 함께 흘러내렸다. 삼십 분이 지나도록 루피의 목소리는커녕 여자의 구두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 달 넘게 고심해 준비했던 이벤트가 무산될 것 같은 기분에 로우는 평소보다 빨리 인내를 잃고 말았다. 사실 루피와 얽히면 언제건 그렇게 되곤 했다.


 "대체 왜 안 오는 거란 말이냐, 밀짚모자야!" 


  발을 쾅 구르고 속내를 토해내자 손에서 불길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계획을 짜며 미리 상상해 보았던 끔찍한 미래가 완벽한 준비라는 댐을 무너뜨리고 홍수처럼 로우의 머리에 범람했다. 선탠이라도 한 것 같이 건강미가 넘치던 얼굴이 삽시간에 파랗게 질렸다. 벌벌 떨며 내려다본 꽃은 줄기가 똑 부러져 꺾여 있었다. 비닐 포장 안에 곱게 장식되어 있던 연보라빛 색지도 엉망으로 구겨져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지. 어떡하지. 눈동자가 정신없이 돌아가며 꽃집을 찾았다. 하지만 약속 장소는 공원이었다. 꽃집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절망하는 로우에게 때마침 두 번째 불행이 몰아쳤다.


 "토라오!!"


  루피가 환하게 웃으며 로우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풀어지는 로우의 입매가 두말할 것 없이 팔불출의 그것이었다. 로우는 연인의 웃음에 현 상황을 몽땅 잊어버리고 루피에게 다가서려 했다. 연이어 발생한 불행에 안타까웠는지 운 좋게도 장미꽃 포장에서 난 바스락 소리가 그를 멈춰세웠다. 제정신이 돌아온 로우가 바닥에 붙박인 듯 섰다. 루피는 그가 자신에게 뛰어들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곤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바람이 탄식하듯 로우 주변을 휘몰아쳤다.


  하필 지금! 오전 내내 보고 싶었던 얼굴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로우는 고함을 내지르려는 입을 가까스로 닫고 머리를 굴렸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 참상을 루피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꽃을 보고 궁금해하면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까지 들킬지도 몰랐다. 로우는 찢어지는 마음을 끌어안고 장미꽃을 나무 뒤로 홱 던졌다. 부러진 꽃은 나무 뒤 수풀로 쏙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뭐야?"


  동그란 눈이 데굴 굴러 나무 기둥으로 향하자 로우가 황급히 시야를 막아섰다. 루피의 얼굴이 아까와는 반대 방향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작은 상자가 든 주머니가 무거워져 로우는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크흠. 아무것도 아니다."


  강제로 미소를 만들어낸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식은땀이 그의 등을 축축하게 적셨고 손동작은 로봇에 비견될 정도로 딱딱했다. 눈꼬리는 애매하게 접혀 웃는지 우는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괴상한 몰골이었다. 누가 봐도 숨기는 게 분명한 행동이었지만 눈치 없는 루피는 그저 잘 모르겠다는 듯 로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루피가 고민에 빠져 입술을 볼록 내밀자 보기 좋게 붉은 입술이 돋보였다. 로우가 크게 숨을 삼켰다. 한 단어가 뇌리를 가득 차지했다.


 "이상한데…."

 "결혼해… 헛!"

 "어엉?"


  이번엔 하얗게 뜬 얼굴이 일그러졌다. 못 들었겠지. 로우가 그렇게 위안 삼으려는 찰나 루피가 폭탄을 터뜨렸다.


 "아하. 결혼하자고?"


  눈을 접어 산뜻하게 웃는 루피는 궁금증이 풀려 시원한 기색이었다. 손바닥을 주먹으로 통 두드리는 모습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뜨거운 것이 주룩 흐르는 감각에 로우는 코를 틀어막았다. 심장이 바삐 뛰어 쿵쿵쿵, 일정한 박자로 그를 울렸다. 멍한 로우의 귀에 그들을 축복하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밀짚모자야가 궁금해하지 않는 걸 보아 환청인 게 틀림없다. 이성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착실히도 움직였다.


 "그래."


  로우는 루피의 발밑에 피어 있던 민들레를 두어 송이 꺾어 포켓치프로 감싸 들었다. 장미꽃 대신 만들어진 조그만 꽃다발은 소탈한 루피와 잘 어울렸다. 여기저기 구겨지고 나뭇잎도 붙어 있는 정장을 입은 로우가 레이디를 모시는 기사의 맹세를 하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결혼하고 싶다."


  주머니에서 잠들어 있던 케이스가 로우의 조심스러운 손길과 함께 바깥에 몸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가죽 케이스가 묘한 크림슨을 띄었다. 루피는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없이 로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런 얼굴이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코피의 흔적이 여실한 낯으로 로우는 저 좋은 결론을 내렸다. 루피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드는 건 진작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우가 기대에 반짝이는 눈을 하고 그 케이스를 열려고 할 때였다.


 "맞아!"


  루피가 기습적으로 로우의 머리를 내리쳤다. 로우는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점차 가까워지는 바닥을 보며 케이스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멀어져 가는 의식의 틈으로 루피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보가 그랬거든. 토라오가 무릎 꿇고 상자 내밀면 이렇게 하라고! …근데 왜지?"


  이 와중에도 목소리가 꾀꼬리 같군…. 그 상념이 마지막이었다.





* 사보의 농간~감히 내 여동생을 노리느냐~


"루피, 그 표범 자식이 그러거든 확 머리를 갈겨!"

"응? 왜?"

"그렇게 한다고 하면 고기 많이 사 줄게."

"좋아! 꼭 때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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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6. 23:40 | 2차


* 사보 출항 직후의 이야기
* 개인적 생각과 과거 날조 주의
* 150615 등록. 150616 내용 추가 및 수정.




  천룡인에게 사람은 길가의 돌멩이와 같았다.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한다는 점이었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사람'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장난감일 뿐이었다. 개돼지만도 못한, 저들끼리 번식하고 자라나는 들짐승이었다. 그래서 하늘과 같은 천룡인은, 그의 길을 막는 눈엣가시를 방아쇠를 당기는 아주 간단한 행동만으로 치워 버렸다.

  사건은 거대한 손길을 인지하고 저항해 볼 결심을 품기도 전에 일어났다. 꿈꾸던 소년에게 성큼 다가온 것은 너그럽지 않은 현실이었다. 사보가 몰래 훔쳐냈던 낚싯배에 그동안의 악행을 벌하듯, 철퇴를 닮은 둥그런 저승사자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불만을 외칠 틈도 없이 두 번째 철퇴가 뱃전을 내리쳤다. 배는 바다 사방으로 살점과 같은 조각을 흩뿌렸고 그 잔해 또한 이어진 폭발에 그슬려 멀쩡한 것이 하나 없었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판단한 참상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바다에서 사보를 구해냈을 때, 피투성이 아이는 가느다란 숨결을 할딱이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서 사보를 보았던 이완 코브는 끈질긴 목숨에 경탄을 표했다. 돛단배보다 작고 더 상하기 쉬운 열 살배기 꼬마 아이는 물에 잠겼다 나왔는데도 채 씻겨 나가지 않은 피에 절여져 있었다. 목재의 파편이 박히고 대포의 화마가 피부를 휩쓸어 멀쩡한 곳이 없었다. 혁명을 꿈꾸는 어른들은, 저 아이가 살아난다면 그거야말로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사보는 눈 한 번 뜨지 않고, 손가락 하나 놀리지 않고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관심과 걱정과 흥미부터 쓸데없이 물자를 낭비하는 빈대를 보는 사나운 눈길까지 온갖 감상이 뒤섞여 사보를 눌렀다. 그 탓인지, 혹은 본디 죽어야 마땅할 부상 탓인지 사보의 용태는 점점 나빠져만 갔다. 식은땀으로 매트리스를 적시는 건 하루에도 여러 번 있었고, 발작은 의사가 마음을 놓으려 하면 일어났다. 미래의 혁명군이 탄 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많은 물자를 보급할 여유는 없었고, 따라서 배에는 사소한 의료품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보는 기본적인 처치만으로 끈덕지게 숨을 이었다. 작은 몸에 얼마나 많은 피가 들어 있는지 붕대에 스며들다 못해 밖으로 새어 나오는데도 버티는 생명이 눈물겨웠다.

  바르티고에 이르기까지 긴긴 항해에서 사보는 몽롱한 의식으로 꿈을 꾸었다. 상처가 짓무르고 뼈가 조각나는 고통에 현실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꿈에서 거침없이 발을 내디디고 호기심에 차 구경하며 보내는 초 단위의 시간마다 저도 모르게 사보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무섭기 짝이 없는 현실과는 달리 꿈은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차마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아름다움으로 사보를 끌어당겼다.

  사보는 배를 타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맑은 호수를 지나 반짝이는 녹음으로 항해했다. 사보의 해적선은 아주 커다래서 마치 그가 전에 보았던 천룡인의 배 같았다. 그러나 화려하고 욕심만 채우는 천룡인의 배와는 달리, 날렵해 보이는 몸체가 깔끔하고 단단해 보여 사보의 취향이라 할 법한 범선이었다. 선장인 사보는 선수에 굳게 발을 딛고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서서 흥분이 가득 찬 얼굴로, 하지만 침착하게 항로를 계산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못할 범선은 그가 손을 뻗는 대로 아주 유연하게 내달려 수풀과 나무의 바다조차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좋은 배네. 빠진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얼굴에 햇볕이 제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사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이었지만, 그곳은 어쩐지 사보가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무 사이로 솟은 하얀 꽃이 배를 스칠 때마다 봉우리를 움츠렸다가 힘껏 꽃잎을 펼치며 향기를 자랑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측백나무가 푸르고 희게 돋은 나뭇잎을 뽐내며 가지를 흔들었다. 그 풍광이 고아하여 사보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토록 빼어난 풍경도 사보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사보는 매몰차게 느껴질 정도로 등을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배가 나무를 타고 오를수록 그가 잘 알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름만으로도 그리운 곳. 코르보 산이었다.

  루피가 떨어졌던 계곡과 셋이서 자주 악어를 잡아먹었던 강가, 곰이 튀어나왔던 동굴을 지나 나무 위 아지트에 이르러서야 배는 정박했다. 아지트에서 방문객을 반기듯 줄사다리가 사보의 발 앞에 좌르르 쏟아졌다. 사보는 누가 내려줬을까 궁금해하며 흔들리는 사다리를 탔다. 텅 빈 아지트는 에이스와 루피, 사보의 흔적이 가득했다. 에이스와 서로 더 크다며 다툼하여 벽에 그어놓은 금, 루피가 발바닥이 아프다고 울먹여 열심히 대패질한 바닥, 구석에 뭉쳐놓은 때 탄 이불이며 베개를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방울진 기억은 사보의 눈가에 아롱아롱 맺히는가 싶더니 뚝뚝 떨어졌다. 에이스와 루피의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짜증 내고 배고파하고 졸음에 겨워 꾸벅이는 얼굴이 차올라 사보의 발을, 무릎을, 어깨를 건드렸다.

  한참을 차오른 형제들 사이를 누비던 사보가 벌렁 드러누웠다. 눈가가 벌겋고 콧물을 훌쩍여 엉망진창인 얼굴이었지만 대자로 쫙 뻗은 사지가 통쾌했다. 눅눅한 목재의 감각이 망토 너머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야. 사보가 생각했을 때 갑자기 짙푸른 물이 사방에서 밀려들어 왔다. 도움을 청하려 입을 열자 짠 물이 입을 그득 채워 산소를 앗았다. 숨 쉴 수 없는 사보는 팔다리가 묶인 것처럼 반항도 하지 못하고 끝도 없이 깊은 바다로 가라앉았다. 차가운 해류가 여린 피부를 스치고 날카로운 상처를 만들었다. 몽글몽글 새어 나온 피가 공기 방울처럼 아득한 해수면을 향했다. 심해에 다다를수록, 가닥가닥 흔들리는 금발 사이로 빠져나가는 핏방울이 늘어날수록 통증은 강해졌다. 상처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느끼고서야 사보는 깨달았다. 이건 꿈이고,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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